공재恭齋. 녹우당에서 공재를 상상하다

녹우당 충헌각  2017.7.27~10.3
참여작가 김기라 김 억 김우성 김은숙 김현철 박방영 방정아 서용선 성태진 
                                 신재돈 윤석남 이이남 이 인 이종구 정복수 조종성 하성흡 한홍수 

오늘 이곳 해남 녹우당에서 18명의 동시대 예술가들이 350년 전 사람, 위대한 예술가 공재 윤두서(1668-1715)와 대화의 장을 연다. 공재는 당쟁이 치열했던 조선 숙종(1661-1720)시절을 살았다. 노론과 대립각을 세운 남인의 지도자 고산윤선도의 증손이자 당대 조선 3대 부자라 일컬어지던 해남윤씨 가문을 이끌어 가야 하는 종손으로서의 삶도 그의 몫이었다. 막중한 삶의 무게를 지니고, 그리 길지 않은 48년의 삶 속에서 한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적 성과를 내었다. 공재 사후 300년의 시간이 흘러 갔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영향받고 싶은 예술가이기도 하다. 조선의 사대부 선비 공재에게 예술은 무엇이었을까? 오늘날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예술가 까지도 공재와 시공을 넘는 대화를 시도하는 데에 오히려 마음을 가다듬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재의 예술적 성과는 조선 중기 이후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실로 조선의 예술적 정체성과 방향을 바꾸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공재가 이룩한 예술적 성과는 실로 광범위 하다.  조선시대 회화의 핵심인 진경산수와 풍속화의 기반을 만들었으며, 형제보다 가까이 지냈다는 옥동과 함께 조선의 서체 동국진체를 시도하였다. 


당대와 후대 예술가들에게 자의식 강한 근대 예술인으로서 예술적 가치와 방향을 제시하였다. 겸제 정선의 진경산수 김홍도 신윤복과 같은 조선 특유의 빼어난 예술가의 예술작품들이 창작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였다. 추사 김정희는 화가라면 그 누구보다 공재의 예술을 본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초의선사와 추사를 비롯해 다산 정약용, 원교 이광사, 소치 허련 등 당대 석학과 불세출의 예술가들의 학문적 성과가 이곳 해남 녹우당을 통하여 이어지고, 해남에 남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영향은 시간을 두고 실로 남도문예 부흥을 일으켜 남종문인화의 상징 소치 허련을 배출하는 데에 일조한다. 소치 허련이 남긴 자서전 '몽연록(소치실록)에 의하면 소치는 대흥사 초의선사를 통해 공재의 그림을 만나고 공재일가가 소장한 서책과 중국에서 유입된 화보를 통해 기본을 다질 수 있었다고 한다. 소치는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후 소치는 추사를 통하여 사대부들과 폭넓게 교류하는 한편 남종문인화의 화풍을 완성시켜 오늘에 이른다. 공재로부터 시작 된 변화는 공재 사후 100년에 지난 후에 출현한 소치 허련을 통해 남도를 예향 혹은 예술의 본향으로 불리도록 하였다. 시작은 공재에게서 비롯되었다. 공재가 태어나 10년의 유년기를 보내고, 낙향하여 여 마지막 3년을 보낸 해남 녹우당에는 고산의 인문학적 유물을 비롯해 조선 인문학의 정수라 할 수많은 문화유산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대부분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을 중심으로 전시·연구 되고 있다. 따라서 녹우당(해남윤씨)의 무게중심은 공재의 증조부 고산윤선도에 실려있다. 그러나 녹우당이 학문과 문화예술의 꽃을 활짝 피워 낸 시기는 공재 윤두서와 연관이 깊다. 박학을 추구하고 예술을 사랑한 공재 윤두서를 중심으로 그의 아들 낙서 윤덕희, 청고 윤용에 이르기까지 가전 고문서와 예술작품들이 이때를 중심으로 집대성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이곳 녹우당에서 350년 전 위대한 예술가 공재 윤두서와 대화를 시도하는 이유이다. 


직업화가가 아닌 조선시대 명문가 사대부이자 조선 3대 갑부집안의 종손이었던 공재에게 예술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본 전시를 위해 새로운 작품을 준비한 18명의 작가 모두 근2년 동안 공재와 대화를 시도하며 스스로에게 질문 하였을 것이다. 


공재가 태어나 살았던 이곳 녹우당이 여전히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녹우당에서 300년이라는 긴 시간을 초월한 예술적 대화의 시도가 가능 한 것도 기적적인 행운이다. 그러나 공재의 예술은 아직 대중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네덜란드뿐 아니라 서양미술의 자부심 렘브란트(1606~1669)와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를 그린 오하네스 베르메르(1632~1675), 프란츠 할츠 역시 공재와 같이 17C 를 살았다. 그들이 살던 집은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예술작품은 300여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전 세계 대중의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 쉬지 않고 책이 만들어지고 영화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이야기들이 덧붙여진다. 그들의 작품을 보기 위한 예술적인 순례도 멈추지 않는다. 전 세계가 일일권이 된 시대에 더욱 중요해진 사실은 공재가 살았던 이곳 녹우당이 오늘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암스테르담에 가면 국립렘브란트미술관과 반고호미술관이 세계각지에서 온 예술적 순례자와 관광객을 맞이한다. 녹우당에 비하면 매우 사소한 이유를 들어 안산에서는 단원미술관을 만들었고, 서울에서는 겸재미술관을 새로 만들어 동시대 작가와 시민이 함께 하는 장을 열었다. 이 전시를 시작으로 공재가 태어나 살던 해남 녹우당이 한국 근현대 예술의 자긍심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미래의 우리 문화예술을 만들어가는 창의적인 동시대 예술현장이 되기를 바란다. 남도문예르네상스의 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