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혜경 : 해남 붉은 땅, 고마운 호박 전
땅끝ㄱ미술관 2017.7.10~8.15
붉은 땅, 복이 넝쿨째 굴러올 것만 같은 호박밭, 고마운 호박
어린시절 읽었던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거인의 정원』은 큐레이터인 제게 가장 의미 있는 동화입니다. 괴팍하고 인색한 거인이 어느 날 자신의 정원에 들어온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서야 비로소 행복해 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처음 해남 임하도에 다다랐을 때 문득『거인의 정원』이 생각났습니다. 쓸쓸하고 한적한 바닷가에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던 그곳은 어쩌면 제가 오기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방을 내려놓고 잠시 눈을 감고 파도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쓸쓸함이 위안이 되었습니다. 임하도 작은 학교 안에 오랫동안 자신을 묶어둔 거인과 친해지고 싶었습니다.
과천 아름다운 숲속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도 제게는 또 다른『거인의 정원』이었습니다. 미술관 마당에 조나단 보로브스키의 작품 <노래하는 거인>까지 서 있었으니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미술관에 어린이들이 들어와 휘젓고 다니며 까르륵대는 소리가 들리면 비로소 동화가 완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열심히 어린이미술관을 만들고 아이들을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거인의 정원』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예술가들은 때로 괴팍한 거인과도 같습니다. 스스로 자신만의 벽을 치고 그 안에 칩거하며 온통 아름다운 나무와 꽃을 가꾸지만 소통에는 매우 인색하거나 소극적입니다. 사람이 다 그렇지만 특히 예술가들은 외롭고 고독한 존재들입니다. 하루 종일 파도와 바람소리만 들리는 쓸쓸하고 조용한 임하도에 가방을 내려놓고 어린아이 같은 예술가 친구들을 부릅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어린아이 같습니다. 즐거우면 행복하다 하고 슬프면 아프다고 화를 냅니다. 아이들과 같은 순수하고 맑은 눈으로 보고 사소한 것들의 가치를 속삭여줍니다. 겁이 많아 우리가 사는 마을의 미묘한 변화조차도 본능적으로 감지하여 큰소리로 이야기해주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지난 3년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마도작업실에서 각자가 본 것들을 거울로 만들었습니다. 예술가들은 그들이 만든 거울로 아름다운 해남을 보여주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하나도 같은 것이 없지만, 모두가 다르지만, 한 결 같이 거울에 보이는 해남은 참 근사합니다. 아름답습니다. 늘 보던 사람들 무심코 지나던 해남이 매우 다른 해남이라고 속삭입니다.
안혜경작가의 거울에는 해남의 늘근 호박을 담았습니다. 바닷가 바람과 날리는 풀 그리고 밤새 분주한 고라니들이 호박밭에서 능청스레 잠들어있습니다. 아이들과 거인의 정원 붉은 땅에 호박이 자라고 고라니와 바람이 들어왔습니다. 참으로 근사합니다. 건강하고 힘이 넘치는 붉은 땅, 복이 넝쿨째 굴러올 것만 같은 호박밭입니다.